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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영동)김씨족보의 건

by 안영모 posted Aug 1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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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청 선생님 ! 안녕하세요.
이 자리에 이런글을 올려도 되는지 무례를 무릅쓰고 올립니다.
전 영동(永同),영산김씨와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둔 가장으로 처가에 보관된 족보가 없어 아들에게 외가의 집안 이야길 해주고 싶어도 못하고 , 제 처는 집안 역사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답답함을 가지고 있던중...
할수 없이  제가 영산김씨 족보를 구하고자 여기 저기 사이트를 찾아 헤매이다 김 현청 선생님의 영동(永同),영산에 대한 기사를 읽고 이렇게 실례합니다..가능한 길이 있는지..있음 구입할수 있는 연락처라도 있을지 ...부탁 드립니다..선생님의 앞길에 행운이 있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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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네 2009.08.17 13:43

     

     

     

     

     

    永山金氏先系系譜

     高麗史및 여러考證에서 찾은 선계로 바로잡았습니다.

    더 이상의 자료는 나오지 않습니다,

    본인은 영김이 아니지만 벗중에 영김이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각고의 노력으로 선계를 찾아 드렸으며

    고려사에서 永山張氏 始祖가 있음도 이번에 알았습니다감사합니다.

     

    永山金氏의 무궁한 발전및 繁族으로 길이 繁昌하시기를 빕니다.

    先系를 밝히시기 위한 몸부림에 위안의 말씀과 拍手를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充分檢證을 거치셨겠지만系譜가 뚜렷한 낮익은 이름들은 다른 金氏들인데 참으로 疑訝 하군요 歷史的 考證說明하지 않으면

    여러 金門과의 紛爭招來念慮되오니 直系祖上인지 다시한번 살펴주심을 김가로서 당부 드리고져 합니다.

    失傳先祖事實대로 찾아서 후대에 길이 물려주어야  떳떳한 조상이 됩니다.

    永山金令貽公이 무슨 이유로 고성김씨조가 되었는지  영김측에서  찾아보셔야 합니다.

    金令貽公  固城땅에  査頓延安金祐公 家門과 함께 살으셨다는 결론입니다.

    김종경(金宗敬) 恭愍王以後 人物

    고려정종시대 문과급제는 잘못 기록된 것입니다.

    관직은 高麗 定宗(王建의 아들) 文科及第하여 右贊成 兼 判義禁府事를 거쳐 左贊成에 이르렀으며, 후에 영상(領相)으로 증직되었다.

    江陵系 固城金氏 伽倻系 固城金氏

    金憲昌822(헌덕왕 14)년대 인물로 永山

    金令貽公之祖라 한것은 언어도단으로 혹 고려인종의 宣平王后의 동생 金貽令  착오인듯 하다.

    新羅聖德王 金興光光山金氏始祖 이름이 똑같듯이 말이다

    金海 金庾信 弘文館修撰 자는興老, 호는洛園. 1510(중종5)進士를하고 1516(중종11)에 문과장원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교리

    가야의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씨 성()의 하나.

    金海金氏首露王始祖로 하고 있다. 이외에 咸昌·晋州·水原·永同金氏 등이 首露王에서 그 根源을 찾고 있다.

    固城金氏, 固城李氏, 固城吳氏, 固城朴氏, 固城南氏, 固城道氏, 固城張氏,固城鄭氏,固城諸氏,固城崔氏

    固城金氏始祖 憲昌公 世系 金令貽 1297年生(高麗忠烈王)-1355(58歲 卒(高麗恭愍王) 固城金氏之祖

    固城金氏始祖 憲昌공은 增補文獻備考에는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후손에서 분관되었다

    小伽倻固城

    固城金氏始祖 金末露王

    固城金氏始祖 金憲昌-金汾(江陵金周元二子) 固城金氏分貫

    固城 : 慶尙南道 固城郡

    固城金氏金相宅 =樂安金粹澄 以下 12固城으로 本貫

    바꿨다(-達賢-金諭[金相宅生父:金說自己樂安金氏임을 主張)

    낙안, 고성김씨 송사 건 김빈길(金贇吉) 양 문중의 송사사건

    金贇吉) 미상1405(태종 5). 호는 죽강(竹岡). 본관은 고성(固城)(1) 본관 고성김씨족보(固城金氏族譜)

    낙안김씨족보(樂安金氏族譜)를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 낙안김씨족보.

    新羅金氏璿源譜에 의하면 신무왕의 아버지 김균정(金均貞)836(희강왕 1)에 있었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여 살해되었고,

    김우징(金祐徵, 후에 神武王)은 청해진으로 피난할때 부인과 어린 왕자 4형제를 데리고 청해진(靑海津)으로 갔다.

    그후 838(민애왕1) 신무왕으로 즉위 하였으나 4개월만에 죽자,

    태자 김경응(金慶膺)이 문성왕으로 즉위하였다그러나 신라 조정과 장보고(張保皐)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文聖王은 김영광(金英光), 김흥광(金興光), 김익광(金益光) 등 형제를 돌보아줄 겨를이 없었다.

    이들은 피난처(避難處)에서 지내다가 강진(康津), 광산(光山), 영동(永同)으로 각각 옮겨가 살았다.

     永山金氏先系 正史 

    神武王-益光--仁榮-庚信-永貽-吉元(恭愍王時 版圖判書), 

    金氏分貫錄(김씨분관록)| 우리들의 이야기

    永同金氏庚信典客令貽后(영동김씨경신전객령이후)

     

    勿 捧 秩(물봉질)

    典故大方 萬姓始祖編 = 김유신은 잘못 기록(고려시대에 동명이인이 없다),

    永同金氏永貽 典客令 父庾信 其先本新羅大姓累世立功于朝-金庚信이 옳음.

    cafe.daum.net/sergo/RJHE/115 등고령  

    永同金氏(영동김씨) 2010.07.11

    永同金氏(영동김씨)始祖(시조)令貽(영이)(典客令(전객령)

    ()庚信(경신)其先本(기선본)新羅(신라)大姓(대성)累世立功于(누세입공우)朝遂爲土姓(조수위토성)

    一云(일운)永同金氏(영동김씨)太子(태자)詹事(섬사)金益光(김익광)之后(지후)()興光(흥광)())

    玄孫(현손)守溫(수온)(()領中樞(영중추)功臣(공신)永山府院君(영산부원군)選湖堂(선호당)文平公(문평공))

    金苞(김포)處置使(처치사)爲一派(위일파

    朴時庸 字 道夫 諱 時茂

    高麗 贈 推忠端明 翊祚功臣 三重大匡 門下贊成事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 西御留山 太沼 嶝雲洞 癸坐 서기1321辛酉(고려) 淸道 豊角에서 永同으로 入鄕移居? 고려 공민왕4년을미 서기1355년졸

    :貞夫人 永山金氏 奉慶和宅主 父:典客寺令 判閣致仕 永山府院君 金令貽()3.

    ;都校署承 仁榮 曾祖;監門長 瓚 外祖;版圖正郞 商山 朴允琪

    金訓-父金宗敬-祖父金吉元-曾祖金令貽(三壻 延安金光澤 知端州事(1325年生推測) 配位 永東金氏

    金令貽 1297年生(高麗忠烈王)-1355(58歲 卒(高麗恭愍王朝

    配位 朴氏 朴允奇()

    魚伯遊[十四代祖]伯遊三司左尹墓在固城[]贈淑夫人延安金氏門下贊成事祐之女

    魚得龍 [十五代祖]得龍 典客署令墓在固城

    延安金祐 高麗 忠烈王時 文臣 門下贊成事 監春秋館事 211知端州事 光澤

    墓所: 慶尙南道統營郡道山面院山里-舊固城縣 道善山 

    配位墓所: 義昌黃氏 固城郡固城邑時達里-蓮池里

    三壻 延安金光澤 知端州事

    配位永東金氏 父典客寺令永貽,外祖 朴允奇(允琪) 

    永山金令貽丈人 : 朴允奇 , 金令貽配位朴氏 - - - -延安金氏族譜

    永山金令貽 配 貞敬夫人 商山<尙州>朴氏 版圖正郞 朴允琪 --永山金氏族譜 아들 吉元와 세 사위

    長壻-順天人 朴元龍 吏部侍郞,

    次壻-求禮人 張丕 漢城判尹,

    四壻 密陽人 朴時庸 大提學)對同

    順天朴氏2世祖 侍郞公 諱,元龍 生卒年 未詳.

    配位永山金氏1남 휘 天祥을 두었다.

    高麗末中顯大夫 典客寺令 永山君 金令貽難國하려고 重臣들과 힘을 합쳐 온갖 힘을 다 했으나 기울어진 國運李氏에게로 기울어

    두아들 吉元와 세 사위를 데리고 高麗 典客寺令 金令貽가 벼슬을 버리고 永山地方으로 落鄕하였다.

    永山金氏分明 5先系해 내려온다

    375이라는 歲月~失傳(金瓚~金仁榮) 差異가 있어도 系代되고 있다

    375년의 數値金瓚~金仁榮差異일뿐.永山金門468이 옳은 計算.  

    1684년 영산김씨족보(永山金氏族譜. 創始譜) / 송시열(宋時烈) () 신무왕의 아들은 4이 있었는데, 첫째 慶膺(文聖王), 둘째 永光(康津金氏), 셋째 興光(光山金氏), 넷째 益光(永山金氏)이다

    * 鷄林金氏璿源世系表-金寧金氏璿源世系表

    22(神武王)신무왕-23(文聖王)-24-25-26-23(益光)-()- (仁榮)-(永貽)

    * 金氏分貫淵源系譜圖;神武王後裔分貫系圖] 益光--仁榮-永貽~吉元

    永山金氏大同譜卷之首76

    金益光 新羅 809年生-872(63歲 卒) 太子擔事光祿大夫 , 擔魯는 아들

    金 瓚 新羅 829에 태어나 90071歲卒)을 데리고 家族永同으로 避亂 을 와서 居住

    金仁榮 1275年生(高麗忠烈王-1331(57歲 卒)

    金令貽 1297年生(高麗忠烈王)-1355(58歲 卒(高麗恭愍王) 固城金氏之祖

    金吉元 1328(高麗恭愍王)年生~1396(68歲卒)  

    金宗敬

    永山金氏先系復原

    神武王-金益光-金瓚-金正-金原得-金忠義-金公立/金公諒-金敬元-金文蔚-金信規-金式-金令器-金先錫-金仁旦-金純-金季鳳-金莘尹-金純永-金慶夫-金得鈞-金允珍-金仁榮-金庚信-金令貽-吉元(恭愍王版圖判書),

    永山金氏 中始祖=>

    23世 四男 익광(益光) (809~872) 태자첨사

    24() (829~900) 太子詹事監門衛平章事,

    25() 862(경문왕2)伊飡上大等,

    26원득(原得)

    27충의(忠義)

    28공립(公立)/공량(公諒)

    29경원(敬元)

    30문울(文蔚)873工部員外廊,

    31신규(信規) 918白書省卿.

    32世 식(式) 伊飡 將軍

    33영기(令器) 平章事

    34선석(先錫) 10331104 太僕少卿,

    35인단(仁旦) 上將軍

    36() 1120平章事判戶部事上柱國

    37계봉(季鳳) 溟州副使,

    38신윤(莘尹) (1146~1170) 左諫議大夫

    39온기(蘊琦)

    40순영(純永) 1168大將軍

    41경부(慶夫) 將軍

    42득균(得鈞) (1235-元宗1260)庚申 進士試 壯元

    43윤진(允珍) 判事

    44인영(仁榮) 1275,

    45경신(庚信) 1286,

    46영이(令貽) 1297,

    47길원(吉元) 1328,

    아래는 本貫을 찾아낸 人物입니다.

    義城金洪述(弘述)-義城 金晅-義城 金曣-義城 金存誠

    金洪述(김홍술)(一作(일작)弘述(홍술)高麗(고려)開國功臣(개국공신)義城城主(의성성주)()忠祠(충사)爲一派(위일파))後孫(후손)金晅()(忠烈王時(충열왕시)()贊成(찬성))

    (김연)(高麗(고려)忠穆王時(충목왕시)持平(지평)爲一派(위일파) ()金存誠(존성)(()判書(판서)).

    舍利函記, 善德女王 15黃龍寺 9木塔文聖王代 기울어져 景文王 11(871) 金魏弘最高 責任者로 새로 고쳐 다음해 7월에 完工, 이때 大舍 金公立이 탑의 重修工事參與했다는 事實紀錄, 906년에 策命使로서 歸國金文蔚工部員外郞  新羅坊(新羅村): 新羅人集團 居住地, 文登縣赤山村 赤山院(新羅人寺刹)

    新羅所: 新羅人나라에 設置自治的 行政 機關으로, 新羅坊居住하는 新羅人管理. 906년에 策命使로서 歸國金文蔚工部員外郞 沂王府諮議參軍이었고, 또한 847년 윤3월에 등주 유산포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로 온 副使 金簡中東宮 所屬太子通事舍人,

    金訓 문과 정종(定宗) 1(13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4(14/33)

    金訓 (1016) 거란침입시) 등의 부모자매()()숙부백부 중에 연좌된 자는 모두 방면하고 그 아들과 동복형제는 본관으로 돌려보내어 상사(常赦 특사(特赦)대사(大赦)와는 다른 보통의 사면령)에는 죄를 용서해 주지 않도록 함.

    梁山金德符(?1082(문종36)-文宗文臣()-金猛 顯宗參知政事,(父金贄-祖父金衍)-金忍訓 原州金巨公,江陵金闡, 江陵金永寬,金永錫,金永胤, 金永存 驪州人(子金俊,金俊光):金俊妻父 郞將金純永 金允侯(金堤),金俊(金海:金允成子)金律(羅州:侍中),金摯(錦山), 金鼎(光山),金德符(梁山),金裕兼(:慶州),金忍訓(梁山),金猛(梁州),金晙(開城),金瓊(三陟),金厚(安東),金旦(順天),金尙賓(光山),金光軾(光山),金行瓊(靈光),金克儉의 아들金永夫(靈光:金甫當父),金元鼎(慶州),金義珍(慶州),金忠贊(安山),金鳳毛(全州),金堅述 (江陵),金官侯(開城),金良儉(慶州:順僖王后父),金因渭(慶州:元順淑妃父),金元沖(慶州:容節德妃父), 安東金革, 慶州金良贄, 安東金良佐, 慶州金慶廉, 慶州金行恭, 中和金如琢, 豊海金仁裕, 金洪述 義城金氏始祖 金致陽(?~1009)本貫 동주(洞州: 黃海道 瑞興) 金漢忠 慶州金裕兼高孫, 金叔興( ?~1011)本貫 慶州金氏 金義珍本貫 慶州金氏(金周鼎-金義珍-金候德) 金殷傅 安山金氏. 金忠贊 安山金氏 金甫當 靈光金氏 金信 全州金台瑞孫 金富允兎山金氏(月城金氏). 金鍊 光山金氏 金敞 安東金氏,金俊(王居)驪州金永存子 唐岳金鐵, 牙山人金行濤.

    科擧及第

    金宗敬(高麗定宗) 文科 及第

    金 訓(김훈) (1676 丙辰生) : 文科 定宗1(1399) 式年試 同進士

    金守溫(김수온) : 文科 世祖12(1466) 登俊試 一等 壯元及第

    金守溫(김수온) : 文科 世祖12(1466) 拔英試 一等 壯元及第

    金守溫(김수온) : 文科 世宗23(1441) 式年試 丙科

    金守溫(김수온) : 文科 世祖3(1457) 重試 乙科

    金澕(김화) : 文科 世祖 12(1466) 拔英試 三等 

    金知復(김지복) (1568 戊辰生) : 文科 仁祖2(1624) 增廣試 乙科

    金天龍(김천룡) (1594 甲午生) : 武科 仁祖15(1637) 別試 丙科

    金大習(김대습) (1590 庚寅生) : 武科 仁祖15(1637) 別試 丙科

    金大聲(김대성) (1594 甲午生) : 武科 仁祖15(1637) 別試 丙科

    金永甲(김영갑) (1679 己未生) :司馬試 肅宗31(1705) 增廣試 二等

    金益謙(김익겸) (1676 丙辰生) : 文科 肅宗39(1713) 增廣試 丙科

    金基準(김기준) (1774 甲午生) : 司馬試純祖13(1813) 增廣試 三等

    金載斗(김재두) (1794 甲寅生) : 文科 憲宗1(1835) 增廣試 丙科

    金鎭權(김진권) (1862 壬戌生) : 司馬試 高宗19(1882) 式年試 二等

    (文科 7, 武科 9, 司馬試 9, 譯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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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네 2019.02.12 14:39

     

     

    神武王인 김우징(金祐徵)은 청해진으로 避難할때婦人과 어린 王子 4兄弟 (부인 박씨 경응, 영광, 흥광, 익광....新羅金氏 璿源譜에 의함)를 데리고 우선 황산진구(黃山津口)(낙동강 하류, 梁山金海사이)로 피한 다음 배를 타고 청해진(莞島)으로 갔던 것이다. 장남인 태자 경응의 나이가 겨우 15세 때라고 적혀있다.그후 서기 839년 달구벌 전투에서 대승하고 金城(慶州)으로 공격할 때 44대 민애왕이 살해되고 45神武王의 혁명 과업은 성공한 것이다. 우징은 839428일에야 45대 왕으로 즉위하니 그동안 왕통이 3개월이나 공백이 생겼으니 당시의 정정(政情)이 매우 복잡했던 것을 알수 있다.이 때가 1월 이었는데 왕위에 오른 것은 4월이고 723일 승하하니 실로 短命王位였다 그런데다가 이해 나이 19세였던 태자 경응(慶膺)이 같은해 746文聖王으로 즉위했다.그러나 문성왕 즉위 후에 신라 조정과 장보고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한때 정정이 어수선 하게 되니왕은 英光, 興光, 益光등 형제를 돌보아 줄 겨를이 없었다.그리고 청해진에서 金城으로 오는 도중 光州까지는 왔으나 父王逝去하였으므로 慶州는 다시 불안한 상태가 될 것이므로 歸京하지도 못하고 光州地方에서 그대로 머물러 살게 되었다따라서 이들은 피난처(避難處)에서 永住 하다가 康津,光山,永同으로 각각 옮겨가 살았다구전되어 오는 설화나 신라김씨 선원보의 기록에서 보듯이 그러기에 영광은 강진김씨(康津)의 관조(貫祖)가 되고, 흥광(興光)은 광산김씨(光山)의 관조가 되고, 익광은 영동김씨(永山,永同)의 관조가 되었다康津金氏門人脈圖다른 하나는 김영광(金英光)으로 신라 신무왕 둘째 아들이다. 신라김씨선원보에 의하면 신무왕의 아버지 김균정(金均貞)836(희강왕 1)에 있었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여 살해되었고, 김우징(金祐徵, 후에 神武王)은 청해진으로 피난할 때 부인과 어린 왕자 4형제를 데리고 청해진(靑海津)으로 갔다. 그 후 838(민애왕 1) 신무왕으로 즉위하였으나 4개월 만에 죽자 태자 김경응(金慶膺)이 문성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신라 조정과 장보고(張保皐)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문성왕은 김영광(金英光), 김흥광(金興光), 김익광(金益光) 등 형제를 돌보아 줄 겨를이 없었다. 이들은 피난처(避難處)에서 지내다가 강진(康津), 광산(光山), 영동(永同)으로 각각 옮겨가 살았는데, 김영광은 이후 강진김씨(康津金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고 한다.뿌리찾기는 고려사및 묘지석,각종 김씨고서류외에는 찾기가 매우 힙듭니다.永同邑縣誌 총묘(塚墓) 항목 인물(人物) 항목영산군(永山君)김길원(金吉元) 고려때 조정에 공을 세워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진 뒤 토성(土姓)이 됐다.독립운동의 역사, 김철 없이는 논할 수 없다함평 출신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의 생애신광면 천석꾼지주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 헌신재산 정리 상해3·1 운동 손병희와 중추적 역할임시정부 수립 큰 기여김구·안창호 등과 독립운동윤봉길 의거’·군무장 맡아 동분서주 과로로 순국기념관 바로 뒤에는 일강 김철의 가묘와 두 부인의 묘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후손 김만선씨는 영산 김씨 문중이 조부(김철)의 유골을 찾으러 항주에 갔으나 재개발이 이뤄져 묘지 주변 흙으로 가묘를 세웠다면서 문중에서는 조부의 첫번째 부인의 친정을 찾으러 함평 근방을 다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회상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1975, 그의 고향인 함평과 그가 공부했던 영광군의 경계에 지자체에 의해 숭모비가 건립됐지만, 그의 업적이 알려진 것은 기념관이 세워진 2000년대 초반부터다.김씨는 독립운동에 대한 조부의 업적은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서거하신 뒤 독립까지 10여년의 공백에 존재가 잊혀져 갔다면서 이제라도 임시정부 복원청사와 기념관을 통해 조부의 숭고한 애국혼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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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네 2019.02.14 22:54

    永山金氏宗親會에 로그인 않는 자유게시판이나 芳名錄을 만들어야 여기 글들을 올릴수가 있습니다.  

    남의 조상을  내 조상이라고  하면  어불성설 입니다.영김측에서 찾아보아야할 선계로 仁宗婦人 선평왕후 동생金貽永(父金璿,)本貫입니다,

    :萬姓大同譜蘊州金氏編(始祖金就谇-大成-汝砥-善鳴-泰鎰-珍蘊-德正:嘉靖時立濟州  失其傳 (嘉靖)年間中宗 17(1522))이 있으나 다른곳은 나오지 않듯이 말입니다. 連絡杜絶 絶孫으로 버려진 祖上들이 많습니다.

    한반도에선 통일신라시대까지 성씨만 쓰다가 고려시대가 되면서 지방에 해당하는 본관(本貫)’제도를 도입했다.

    애초 본관은 곧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씨족 거주지를 뜻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한양 등 대처로 인구 이동이 많아지면서 본관이 일평생 한 번도 못 가본 지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선계찾기로 아래와 같이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밝혀내야겠습니다.

    永山金氏先系 神武王-金益光-金瓚-金正-金文蔚-金信規-金浩晙-金令器- 金先錫-金殿邦-金錫符-金誠-金大齡-金仁旦-金純-金季鳳-金莘尹-金純永-金慶夫-金得鈞-金允珍-金仁榮-金庚信-金令貽-吉元(恭愍王版圖判書),

    小伽耶國 時代遺物 '고인돌'이 자리잡고 있는 新羅王子들이 黃山津口(金海 ;駕洛 - 小伽耶(固城) 洛東江下流로써 梁山金海사이:高麗時代 許麒辛旽을 탄핵했다가 統營 竹島歸養歷史가 있듯이) 永山金令貽公께서 固城金氏之祖先代祖有關하다,新羅王族後裔:金敬元-金公諒/金公立(兄弟)-金忠義(806-820:金忠儀 新羅人德宗朝官將軍)-金原得 김씨 부인은 864년에 죽었고, 그 때의 나이가 32살이니 832년에 태어난 것이다.舍利函記, 善德女王 15黃龍寺 9木塔文聖王代 기울어져 景文王 11(871) 金魏弘(경문왕의 아우 )最高 責任者로 새로고쳐 다음해 7월에 完工, 이때 大舍 金公立이 탑의 重修工事參與했다는 事實紀錄,

    金宗敬 先祖高麗靖宗朝 文科及第事實이 아닙니다 즉高麗靖宗朝文科 及第者 名單에 없습니다.

    김길원(金吉元)의 아들 김종경(金宗敬)定宗(고려정종시대가 아닌 조선정종조) 춘추관(春秋館:시정의 기록을 맡아본 관아)과 성균관(成均館:유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을 역임한 후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의 정2)에 올랐다.

    永同邑縣誌 총묘(塚墓) 항목 인물(人物) 항목에 영산군(永山君) 김길원(金吉元), 고려 때 조정에 공을 세워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진 뒤 토성(土姓)이 됐다.“永同縣邑誌”(영동현읍지 1999년 간행) 다음과...태종 13(1413) 右贊成 金宗敬이 창건한 강학당으로 그의 호를 따라 楓川堂이라 하였다백성의 고통을 조사하게 하다. 김훈·윤흥부 등을 외방 종편시키다

    下旨義禁府曰: “永同付處金訓羅州付處尹興阜原州付處康有信沃川定屬朴安守, 皆令外方從便, 權堡李法華黔同李弘, 家産還給김훈을 영동의 농사에 안치하다. 아들 김여달이 신정한 까닭이다

    安置金訓于永同農舍 訓子如達申呈云:"大父宗敬年老在永同" 故也

    , 金訓配役遠裔, 其父宗敬申訴, 命外方從便左獻納安修己啓: "訓之罪, 不可輕赦, 今許外方從便如欲父子同處, 則請移定其父所住永同官奴" 上曰: "太宗朝, 已令從便, 其後定役, 非訓之罪也己亥東征時, 太宗降旨, 募赴征者, 訓之妻兄李迹薦訓於李從茂 使赴東征之役故也" 修己再啓曰: "雖移定其父所居官奴, 亦是過蒙上恩也" 上曰: "訓之往者從便, 固此罪也, 今者從便, 亦此罪也 旣許從便, 以悅老父,予當不從

    뿌리찾기는 高麗史墓誌銘,각종 김씨古書類외에는 찾기가 매우 힙듭니다. “독립운동의 역사, 김철 없이는 논할수 없다함평 출신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의 생애신광면 천석꾼지주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 헌신재산 정리 상해3·1 운동 손병희와 중추적 역할임시정부 수립 큰 기여김구·안창호 등과 독립운동윤봉길 의거’·군무장 맡아 동분서주 과로로 순국 기념관 바로 뒤에는 일강 김철의 가묘와 두 부인의 묘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후손 김만선씨는 영산 김씨 문중이 조부(김철)의 유골을 찾으러 항주에 갔으나 재개발이 이뤄져 묘지 주변 흙으로 가묘를 세웠다면서 문중에서는 조부의 첫번째 부인의 친정을 찾으러 함평 근방을 다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회상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1975, 그의 고향인 함평과 그가 공부했던 영광군의 경계에 지자체에 의해 숭모비가 건립됐지만, 그의 업적이 알려진 것은 기념관이 세워진 2000년대 초반부터다.김씨는 독립운동에 대한 조부의 업적은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서거하신 뒤 독립까지 10여년의 공백에 존재가 잊혀져 갔다면서 이제라도 임시정부 복원청사와 기념관을 통해 조부의 숭고한 애국혼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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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네 2019.02.18 22:23

    永山金氏繁族萬代榮華祈願하며

    광산김씨계보가 여러대로 이어져 내려오듯이 이제 영산김씨 선계 또한 길게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거족으로일부 본관 설명에는 敬順王7세손 영산김씨로 잘못 기록된 곳도 있었습니다,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文科及第했다는 紀錄은 잘못된 것입니다,

    高麗靖宗 文科及第者 名單에 올라가 있지를 않습니다.

    앞으로 바로잡아 후손들에게 眞率族譜史를 전해주어야 현대를 사는 시대인의 도리가 될것입니다.

    2009년도에 作成永山金氏家系圖를 옳다고 判斷하심은 自由이오나 남의 조상들을 系代로 부끄러운일 입니다新羅金氏大宗院(社團法人 新羅文化保存會)으로 한번 依賴하시어 諮問을 받으심이 賢明할듯 생각합니다

    김씨들 가운데 150여 김씨가 始祖未詳인 김문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지방도서관및 부천족보전문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등을 찾아다닐때 어떤김문은 경순왕후손으로 되어있었으나태종무열왕의 후손임을 고증에서 찾아 통보및 창시보를 모르던 김문에 알려주는등 나름대로는 좋은일 한다고 해왔습니다,

    발로 뛰고 고려사절요를 샅샅이 뒤져야만 잃어버린 조상들을 찾을수 있습니다.저는 옥천 보은에 연고가 있어서 보은을 찾다보면 영산김씨 현판을 보게됩니다다시한번 부탁의 말씀은 영김에서도 이제 저처럼 영김선계를 더 깊이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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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네 2019.02.27 20:58

    정읍김씨 (井邑金氏)

    시조김수온(金守溫)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사직(司直)을 지냈다.그의 선계는 영산김씨(永山金氏)와 동원이며 후손들이 정읍(井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한편 김수온(金守溫 : 文良, 시호 文平)이란 인물은 영산김씨 족보에 5세조로 나타나 있다. 그는 1441(세종23) 문과에 급제하여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고, 승문원 교리로서 의방유취(醫方類聚)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부사직(副司直)으로 석가보(釋迦譜)를 증수하였다. 벼슬은 병조정랑·첨지중추원사·공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1471(성종2)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당시 서거정(徐居正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문명을 덜쳤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을 만들었고, 명황계감(明皇誡鑑)을 국역하였다. 또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불경의 국역과 간행에 공이 컸던 조선 전기의 명신이다. 그러나 영산김씨의 5세조인 김수온이 정읍김씨의 시조 김수온과 같은 인물인지는 문헌이 없으므로 확인할 수 없다. 김씨분종보(金氏分宗譜)에 정읍김씨(井邑金氏)는영산김씨동원(永山金氏同源) 정읍김씨 (井邑金氏) 157가구,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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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네 2019.02.27 21:43
    新羅坊(新羅村): 新羅人集團 居住地, 文登縣赤山村 赤山院(新羅人寺刹) 新羅所: 新羅人이 唐나라에 設置한 自治的 行政 機關으로, 新羅坊에 居住하는 新羅人을 管理.  
    906년에 唐의 策命使로서 歸國한 金文蔚은 工部員外郞 沂王府諮議參軍이었고, 또한 847년 윤3월에 등주 유산포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로 온 副使 金簡中은 東宮 所屬의 太子通事舍人,   舍利函記에, 善德女王 15년 黃龍寺 9층木塔이 文聖王代 기울어져 景文王 11년(871) 金魏弘을 最高 責任者로 새로 고쳐 다음해 7월에 完工, 이때 ‘大舍 金公立’이 탑의 重修工事에 參與했다는 事實이 紀錄, 906년에 唐의 策命使로서 歸國한 金文蔚은工部員外郞  
    京兆縣開國男 金因渭 京兆尹 韓愈
    헌종 5년 12월 29일 신묘 京兆에서 백성의 수(數)를 올리었다
    京兆 出身으로 唐나라戶部尙書 宋柱殷의 後孫 自英
    양쪽의 보책(譜冊=족보)과 京兆의 戶籍을 가져다 살펴보니
    도강 출신 인물로는 인종 때에 활약했던 김함(金諴, 1076~1147)이 있다.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에서 관리로 활동했는데, 본관이 경조(京兆)였다고 하는데, 도강 김씨 인물로 추정된다.
    京兆金氏. 京兆李氏, 京兆鄭氏, 京兆王氏.
    京兆金氏 金大齡-父 金 誠- 祖父 金錫符-曾祖 金殿邦 김함(金諴)
    1076년(문종 30)∼1147년(의종 1). 고려 중기 문신. 字는 덕원(德元)이다. 本貫은 개성(開城)이고, 고려 전기의 문신.  本貫은 道康, (전라남도 강진군). 出身地는 전라남도 도강군(道康郡: 현 강진군(康津郡))이다.조부는 검교태자대부(檢校太子大傅) 전방(殿邦)이고, 부친 증검교태자대사(贈檢校太子大師) 김석부(金錫符)와 모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오정(吳頲)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상승봉어(尙乘奉御) 노격(盧格)의 딸이다.20세에 명경과(明經科)에 문과 급제하였다. 장작주부(將作注簿)‧순주수령(順州首領)‧대부주부(大府注簿)‧상서도사(尙書都事)‧감찰어사(監察御史)‧서경분대(西京分臺)‧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비서승(秘書丞)‧병부낭중삼사판관(兵部郎中三司判官)‧위위소경지형부사(衛尉少卿知刑部事)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비서소감어서검토관지호부사(秘書少監御書檢討官知戶部事)에 이르렀다. 뛰어난 행정력으로 가는 곳마다 칭송을 들었다.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정묘년(의종 1, 1147) 11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 72세이다. 그 해 11월 그믐에 성의 남쪽에서 화장하고, 이듬해 7월 26일에 송림현 마산(松林縣 馬山) 서쪽 기슭에 장례지냈다.묘는 경기도 송림현(松林縣: 현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에 있다.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문림랑(文林郞) 위위주부동정(衛尉主簿同正) 김신항(金伸沆)이고, 차남은 국학학유(國學學諭) 김대령(金大齡)이다.1148년(의종 2)에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 양적중(梁積中)이 찬(贊)한 것을 돌에 해서(楷書)로 새긴 「김함묘지명(金諴墓誌銘)」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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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이후니 2022.08.03 07:57
    알지(경주김씨 관시조)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말구 > 내물 마립간 > 복호 > 진종 > 원성왕(경신) > 예영 > 균정 > 신무왕(신라 45대) > 김익광 > 김찬 > 김정 > 김인영 > 김영이(중시조) > 김길원 > 김종경 > 김훈 > 김수온 // 김수화 -----> 25대손까지 쭉

  1. 永山山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永山山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 서라벌에서 永同으로 영산김씨(永山金氏)의 뿌리를 알려면 먼저 대보공(大輔公) 휘(諱) 알지(閼智)의 탄생 설화로부터 시작된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제4대 석탈해왕 9년(中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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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국보 제278호

    국보 제278호 명 칭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太宗十一年李衡原從功臣錄券附函)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일괄(녹권1축,함1점) 지 정 일 1993.04.2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국립고궁박물관 보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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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혜각존자의도력진헌

    慧覺尊者 金守省(信眉大師)의 道力 金振憲 守省은 金訓의 長子로 西記 1403年(朝鮮 太宗3年 癸未)에 태어났다. 始祖 金令貽가 高祖, 金吉元이 曾祖, 金宗敬이 祖父이시다. 태어날 때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 王字가 손금에 있어 父母와 三寸들은 크나큰 걱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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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신미대사(수성 수암)와 반야사

    신미대사(수성 수암)와 반야사 김동현 1. 명당인 생가 신미대사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넷째 왕자공 익자광자(益光)의 후손 영산(영동)김씨 관조이신 영자이자(令貽)의 고손(5세손)으로 증조부가 고려조 판도판서 영산부원군 길자원자(吉元)이며 조부는 조선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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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영산김씨(永山金氏)

    1. 시조(始祖) : 김익광(金益光)(22세)(김알지공(1세) 관조(貫祖) : 김영이(金永貽)(45세, 23세)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영동(永同)은 충북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길동군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때 영동으로 고쳤으며,1413년경상도로부터 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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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의 일생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 조선전기의 승려, 유.불학자 1. 내 용 [img1]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 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처음에 법주사에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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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의문 투성이 한글기원... 신미스님이 열쇠

    한글기원과 신미대사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 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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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세조와 신미대사

    보은미래신문 신미선사는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img1]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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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세조가 신미대사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직 대사의 공”

    세조가 신미대사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직 대사의 공” [img1]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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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속리산 복천암-신미대사와 한글 창제

    속리산 복천암 산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천년고찰(千年古刹)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반도의 한가운데는 충북 지역이고, 충북에서도 속리산(俗離山)이다. 한국의 중심에 속리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속리산에서 보은(報恩) 쪽으로 흘러간 물은 금강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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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영산김씨 선조인 ‘신미대사(1403~1480)의 한글 창제설’

    [조용헌살롱] 신미(信眉)대사와 한글 [조선일보] 속리산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신미대사(1403~1480) 한글 창제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미(信眉)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인데,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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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만든 고려사에 불교신봉자들의 사적을 다 기록했는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만든 고려사에 불교신봉자들의 사적을 다 기록했는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 후 조선 태조가 되어 정도전에게 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 왕조실록 등의 문헌을 보고 고려조를 살아온 학자들에 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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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영산(영동)김씨족보의 건

    김현청 선생님 ! 안녕하세요. 이 자리에 이런글을 올려도 되는지 무례를 무릅쓰고 올립니다. 전 영동(永同),영산김씨와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둔 가장으로 처가에 보관된 족보가 없어 아들에게 외가의 집안 이야길 해주고 싶어도 못하고 , 제 처는 집안 역사...
    By안영모 Views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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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선조께서 왕명을 받아 지었다고 전해지는 월인천강지곡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로,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
    By월간김현청 Views9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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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기산팔경(箕山八景) - (氷玉亭)

    ***高麗 末의 中顯大夫 典客寺令 永山君 金令貽는 難國을 求하려고 重臣들과 힘을 합쳐 온갖 힘을 다 했으나 기울어진 國運이 李氏에게로 기울어 두 아들 吉元과 苞와 세 사위(長壻-順天人 朴元龍 吏部侍郞, 次壻-求禮人 張丕 漢城判尹, 四壻 密陽人 朴時庸 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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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알지계 김(金)씨의 유래

    60년(신라 탈해왕(脫解王)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것이 보여 가서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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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자주성을 표현한 비문-영산김씨세장비 [永山金氏世葬碑]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영산김씨 23대손 김철(金澈)이 1919년 봄 상하이[上海]에서 입국하여 이 비문을 써놓았다고 한다. 그가 3·1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간 뒤, 종중(宗中)에서 그해 10월에 이 비를 세웠다....
    By월간김현청 Views5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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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문평공(文平公) 김수온(金守溫) 묘소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명성을 날린 영산 김씨(永山金氏)는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 :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
    By월간김현청 Views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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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영동(永同),영산

    http://www.genealogy.co.kr/soung1.htm영동(永同),영산 영동(永同)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길동군(吉同郡)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영동(永同)으로 고쳤으며, 서기 995년(...
    By월간김현청 Views7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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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永山金氏淵源

    영산김씨(永山金氏)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이고 신무왕의 후손이다. 라, 여(羅, 麗) 양조에 걸쳐 출사입공해 오던중 고려말의 전객시령공이 영이 (令貽)는 쓰러져 가는 고구려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전력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직. 낙향할제 두 ...
    By월간김현청 Views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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