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형태로 간직되었다가 나중에 재생 또는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현상. 그것이 기억이다. 나는 종종 생각했다. 잊은 지도 모른 채 잊고 지내는 기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에 대해. 모두 특정한 상황이나 물건 혹은 냄새 등을 접하면 그제야 선명하게 되살아날 것들이다. 한 권의 책으로 지난날의 기억과 마음을 되찾는 곳. 이것은 헌책방의 이야기다.
interviewee '책밭서점' 김창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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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손님, 두 번째 주인장
봄날치곤 볕이 제법 뜨거웠던 날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은 이른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네 시. 우리는 연한 바람이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서점 입구에 모여 앉았다. 그러고선 그가 내려준 커피와 노트와 펜 그리고 녹취기를 가지런히 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뭐 별 특별할 것도 없는데 인터뷰를 한다니깐 괜히 쑥스럽네요(웃음). 저는 제주도에서 책밭서점이라는 헌책방을 운영하는 올해 쉰아홉 된 김창삼이라고 합니다.
서점 바닥이 되게 예스럽네요. 이런 바닥은 정말 오랜만에 봐요. 책밭서점은 언제 시작된 거예요?
책밭서점은 이제 25살쯤 먹었어요. 사실 책밭서점 자체는 85년 2월 28일 날 처음 탄생했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책밭서점의 두 번째 주인장이에요. 제가 맡게 된 지가 25년 된 거지요.
어쩌다 인수하게 된 거예요?
헌책방은 당시의 저에겐 일종의 로망이었죠. 책을 유별나게 좋아했으니까. 저는 개인 신상명세서를 작성할 때면 취미 란엔 꼭 ‘독서’라고 적어 넣는 젊은이였어요. 한창 패기 넘칠 나이였으니 신춘문예에 대한 꿈도 있었고요. 책밭서점과의 인연은 85년 2월 28일부터 시작됐어요. 당시 서귀포에 살던 친구가 이사를 한다고 하길래 도와줄 겸 서귀포에 들르게 된 거예요. 근데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못 보던 헌책방 하나가 생겼더라고요? 간판도 아닌 현수막 하나 걸어두었는데, 큼직하게 책밭서점이라 적혀 있었고 밑에 그것보단 작은 글씨로 헌책방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들어가 보니 7, 8평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죠. 그날 함석헌 선생의 ‘씨울의 소리’와 ‘다리’라는 노동 잡지 몇 권을 샀어요. 돈이 모자라 같이 갔던 친구한테 돈까지 꿔가며(웃음). 근데 계산하는데 당시 주인장이 그러더라고요. 제가 첫 손님이라고요. 11시쯤 개업을 했는데 저희가 12시쯤 들어가게 된 거죠(웃음). 그 이후론 시간이 나는 대로 들렀어요. 그렇게 오고 가다 주인장과 얘기를 나눈 것이, 나도 헌책방에 대한 꿈이 있으니 만일 책밭서점을 넘겨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땐 나한테 먼저 얘기를 해 달라, 그랬죠. 그리곤 1992년 어느 날 정말로 전화가 왔어요. 사정이 있어서 육지로 올라가게 됐는데 진심으로 할 생각이 있느냐고요. 너무 기뻐서 고민할 것도 없이 계약하고 그 길로 회사에 사표를 냈죠(웃음).
와, 첫 번째 손님이 두 번째 주인이 된 거네요. 기분이 어땠나요?
아, 다 얻은 기분이지(웃음). 이걸 인수한 후론 그 좁은 공간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 세 시까지 책만 읽었는데, 그렇게 온종일 책만 읽다 보니 나중엔 헷갈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이 책이 저 책 같고, 저 책이 이 책 같고(웃음). 그래도 뭐 너무 좋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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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문밖으론 책방서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종종 지나갔다. 그러다 한 모녀가 들어왔고 동화책 몇 권을 골라 계산대에 내밀었다. 주인장이 돋보기안경을 꺼내 걸치고 느린 속도로 계산하는 동안 우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꽤 오시는 걸요?
(웃음)그랬으면 좋겠지만, 사실 하루 매출이 2, 3만 원에 지나지 않아요.
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조금이에요.
이 얘길 해주면 다들 묻죠. 돈벌이도 안 되는데 굳이 왜 지키고 있느냐고. 2000년 이후로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헌책방 문화는 점점 사양길로 들어섰어요. 예전엔 헌책방도 인문이면 인문, 자연이면 자연, 사회면 사회, 이렇게 전문헌책방이 즐비했는데, 현재는 이것저것 다 파는 형태로 변하게 됐어요. 공급 자체가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를 갖추게 된 거죠. 근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에요. 책밭서점 역시 처음엔 큰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골목 구석으로 밀려나게 됐어요. 92년부터 이사를 네 번이나 했는데, 할 때마다 접니 마니 고민이 많았어요. 비싸지는 임대료에 비해 수입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가고, 자식들은 점점 커가니 저 역시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힘들더라도 계속 이어가 달라는 단골들의 부탁도 있었고, 스스로 미련도 남아있었고, 그래서 계속 책밭서점을 운영해나가되 대신 생계를 위해서 농사꾼을 겸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현재는 오전엔 농부로 오후엔 헌책방 주인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웃음).
컴퓨터가 범인이네요?
(웃음)근데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제보다 편해지려는 건 세상의 본능인 것 같아요. 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에 관심이 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같고요.
그렇죠. 이를테면 시대의 흐름과 같은. 요즘 젊은 친구들은 책을 잘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이해는 해요. 책 말고도 재밌는 게 너무 많은 세상에서 자라왔으니 그럴 수밖에요. 저희 때는 책이나 음악, 이것 말곤 딱히 취미로 삼을만한 게 없었다고 해야 하나요. 요즘과 달리 시간이 느리게 갔던 것 같아요.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러게요. 그런 세대를 사는 저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에요.
(웃음)사실 도통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고 지적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세대의 흐름을 타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거니까. 요즘은 서점도 북카페식으로 공간을 색다르게 활용하던데, 사실 우리 세대는 그런 생각을 하긴 어려운 세대예요. 공간이 있으면 그 공간을 무조건 채워 넣으려고만 하지. 진취적인 건 알지만, 마음같이 안 되는 거죠. 책을 잘 읽지 않는 젊은이들이 이해한다고 얘기하지만, 마음속엔 항상 아쉬움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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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새 학기면 집에서 참고서 살 돈을 받아 나왔다. 그리곤 곧장 헌책방으로 향했다. 헌 참고서를 싼 가격에 살 목적으로. 운이 좋으면 공부에 뜻이 없던 선배가 사용하던 새것과 다름없는 참고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비자금을 챙기던 때.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이젠 중장년이 되어 헌책방을 다시금 찾는다. 잊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과 마음을 되찾기 위해.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네, 제주 향토자료실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오래된 꿈이라, 예전부터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제주 관련 서적들이 5,000여 권은 됩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책밭서점의 2층을 빌려 만들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늦어질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물론 모두 무료로 개방할 예정이에요. 그날이 오면 한번 들러요(웃음).
마지막으로 책 한 권 추천해주세요.
최근에 동양고전, 철학 관련 책을 다시 보고 있어요. 특히 노자, 장자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의 탐욕스러운 부분들이 한순간에 진정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돈 걱정, 자식 걱정 등등 모두 별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들어서 좋아요. 근데 젊은 친구들에겐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어요. 모두 부질없다, 무의미하다, 티끌만도 못 한 인생인데, 뭐 이런 얘기들을 너무 듣다 보면 ‘젊어서 공부하고 노력해서 뭐해. 다 필요 없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이 미치는 건 아닌 지 염려스럽기도 하고(웃음).
사실 헌책방은 20대인 나에겐 추억의 장소가 아닌 호기심의 대상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인터뷰였지만, 그 끝엔 책방 주인장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다시금 오길 바라는 마음만 남았다.
the bom volume 05 <Classic Summer> '저는 '취미'를 기재하는 란엔 언제나 독서라고 적어 넣는 젊은이었어요' 중에서
글 라어진 / 사진 김보경